독일에 온 이후, 시간이 가는걸 특별히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여태까지는 딱히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매월 1일이 기다려지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 이유는... 슈 페 어 콘 토

 

만하임에서 슈페어콘토 없이 비자 발급받을 수 있었다는 글이 꽤 자주 상위 유입검색어에 노출되는데, 지금 사는 지역은 얄짤없이 전부 슈페어콘토를 만들어야한다. 슈페어콘토를 기피하는 이유는 다양히 있다.

 

1. 한 번에 천만원 가량의 돈이 필요하다.

2. 그 천만원의 돈이 1년간 묶인다. 돈이 있지만 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3. 매월 정해진 금액(지역마다 다르지만 대부분은 월 720유로)만 출금할 수 있다.

4. 혹시 중간에 이 계좌를 닫아야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생기면, 외국인청에서 서류를 받아와서 계좌를 없앨 수 있다.

   즉, 내 계좌인데 내 맘대로 없애는게 불가능하다.... 

5. 내가 원해서 개설하는 계좌도 아닌데, 수수료가 살벌히 비싸다.

   도이체방크의 경우 1년 200유로, 슈파카쎄는 지점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100유로. 여러모로 황당하다.

 

100유로라도 아끼고 싶었던 나는, 슈파카쎄에서 슈페어콘토를 만들었다.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본 적은 없어서 비교할 수 없지만, 마부르크 슈파카쎄의 경우, 적금통장을 외국인청 슈페어콘토 형식으로 용도변경을 해서 사용한다. (원래 슈페어콘토가 적금통장이기도 하지만). 이런 귀여운 노트를 주는데, 이게 통장이다. 

 

그리고 통장의 마지막 페이지에 외국인청의 요구에 따라 월 720유로만 인출 가능한 통장이라고 안내되어있다. 이 계좌는 다른 지역의 슈파카쎄에서 출금할 수 없고, 마부르크 내 슈파카쎄에서만 출금가능하다. 이렇게 불편할 수가... 뭐 그래도 100유로 아낀거에 만족한다.

독일에서 살면서 짜증나는 부분은 참 다양한 부분이 있다. 그 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각종 문서작업 없이는 진행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다.... 예를 들면, 외국인청에 비자를 신청하러 가야하는데, 비자 신청하는 날짜의 약속을 잡기 위해 문열기 전의 새벽부터 줄서서 기다려야한다... 비자 신청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짜를 잡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는... 직접 방문해서 줄을 서고 면대면으로 담당자를 만나면서 예약 날짜를 잡는다. 그리고 예약된 시간과 날짜가 적힌 종이를 받는다. 인터넷으로 할 수 있으면 참 간단할텐데^^... 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이 아날로그적인 나라에 대체 내가 뭘 바라나 싶고...


무튼 거주적으로 짜증나는 부분 말고, 학생으로서 힘들고 짜증나는 부분은 당연하게도 돈과 관련된 것이다. 일을 하지 않고도 살아는 갈 수 있는 최저생계비용을 갖고 있어야 학생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가끔 자비로운 도시들에서는 이 재정에 관한 증명을 다양한 방법(그냥 잔고에 1년치 금액인 8640유로 넣어두기, 부모님 소득증명서로 재정보증 등)을 받아주지만, 내가 살게된 이 악명높은 도시에서는 무조건 슈페어콘토를 만들어야한다.


슈페어콘토란? Sperrkonto, 영어로는 blocked account. 돈을 1년치든 2년치든 아무튼 넣어두고, 그 후 매달 정해진 금액만 뺄 수 있는 특수계좌이다. 외국 국적의 학생들이 독일에서 사용하게 되는 슈페어콘토는 월 지출 금액이 720유로로 정해져있다. (도시마다 다를 수 있는데, 대부분의 도시에서 720유로로 정해두었다.)  이 금액으로 살아야한다는 얘기는, 저 금액으로 내가 하는 모든 지출을 다 해야한다는 얘기이다. 기숙사비 학원비 보험 핸드폰 등 모든 것을 다 저 금액으로 살아야한다.......... 720유로, 한화로 약 90만원. 물론 적은 돈은 아니다. 학원비가 들지 않았다면 적당히 살 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학원비를 한 과정당 495유로씩 내야한다......... 다행히 학원은 한 과정에 6주과정이라 이래저래 겨우 살아갈 수는 있다.


고정지출

마부르크 대학 기숙사 220유로 / 보험 35유로 / 핸드폰 9.99유로

월 고정지출 총 265유로.

학원비 6주 한 과정이 495유로니까 4주로 계산하면 330유로인 셈.

이렇게 595유로가 월 고정지출이다. 나는 앞으로 한 달 125유로로 살아야한다.

슈페어콘토를 올해 1월에 만들었고, 1월에 이전에 살던 집의 보증금이 들어와서 2월까지는 엄청 빠듯하진 않았었다. 그리고 3월 24일 오늘, 나는 개그지....ㅠ 세상 이런 그지가 따로 없다. 그래도 기숙사에 살고 있고, 보험도 사보험이라 어느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살 수 있다. 만약 내가 기숙사가 아닌 원룸에서 산다면? 공보험을 내야한다면? 도시에 따라 방값은 차이가 있겠지만, 그 두 개로 이미 6~700유로 순삭..


무튼, 한 달 720유로로 살아간다는건 참 힘든 일이다. 다시 가계부를 쓰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달 말일 즈음에는 3월 가계부를 공개해볼 예정이다. 그게 어떤 것이든 어떤 계획이 미래에 있다는 것은 조금은 좋은 것 같다. 항상 무계획자로 살아왔는데 요즘은 종종 내일 뭐할지 이번 달에는 뭐할지 다음 달에는 뭐할지 생각해보는게 즐겁기도 하다. 물론 항상은 아니다. 계획한대로 되는건 많지 않기 때문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