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시간 중 아홉시간을 깨어있다 보니,

잘생긴 그 승무원 말고도 다른 승무원들이 내가 대체 안자고 뭘 하는지

엄청 궁금한지 오며가며 뭘 자꾸 물어봤다


글씨쓰는데 문제는 없냐고 묻기도 하고

문제 없다고 하니까 너 대단하다고 하기도 하고

열시간의 비행이 끝나가는 시간이 되니까

승무원들은 다 너무 피곤해보이는데

나는 전혀 피곤해보이지 않아서

왜 너는 지치지 않느냐고 하기도 하고

그들은 일이고 나는 그저 앉아서 쉬며 쓰며 하는건데 어떻게 같겠냐고 생각을 했지만

짧은 영어.... 반드시 영어 공부를 더 할테다...... (항상 결심만 한다)



그 중 가장 많은 대화를 했던 이드리스 엘바;

안피곤하냐고, 대부분은 이 높은 하늘에 열 시간을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피곤해한다고, 근데 너는 하나도 안피곤해보인다고 하길래

내가 지금 유럽에 가는게 너무 행복하고 믿어지지 않아서 마치 "뽕맞은" 기분이라 잠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꼭 영어로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괜히 또 어정쩡한 내 영어로 하다가 아부다비 공항에서 경찰에 인계되면 곤란하니까.... 그냥 안자도 별로 안힘들다고 했더니, 완전 놀랍다면서, 우리가 찾던 인재가 너같은 사람이라면서 ㅋㅋㅋㅋㅋ You've got talent!!! 이러길래 응 나 그 프로그램 좋아해 했더니 유머도 있다면서 또 그 외국인 특유의 오버.... 하... 나도 한 리액션하는데 영어가 짧은게 이렇게 안타깝네....  캐빈크루에게 필요한 탤런트가 너한테 있는거 같다고 인터뷰 잡아줄까? 이렇게 농담을 해댈 때, 아냐 난 키가 작아서 아마 못할껄? 했더니 키는 규정에 없어 / 키는 없지만 암리치는 있잖아 / 어? 너도 캐빈 크루에 관심있었던거 맞구나??? 하면서 서로 막 웃었다. 설명하려면 어렵단다.... 한국의 기형적인 취업시장에서는 대부분 내 분야가 아니어도 다들 서로 잘 알아....ㅠ



다른 여자 승무원은, 내 테이블뿐 아니라 빈 자리인 내 옆자리의 테이블까지 내려서 엽서 수십개를 펼쳐둔걸 보고는 Wow! You made Office here!!! 이러길래 나는 또 그 말이 왜 그렇게 웃긴지, Yes, I did! Office in Etihad! 이랬더니 또 막 웃고. 다들 웃기도 참 예쁘게 잘 웃지.... 나도 좀 예쁘게 웃어보도록 노력해야지, 빙구웃음 말고...



아무래도 엄마아들에게 도움받을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엄마아들이 주변의 한국인에게 환심살 수 있도록 면세담배를 사가겠다고 그렇게 장담을 했는데, 면세담배는 개뿔... 내 면세품 픽업도 못해갈뻔 했다고...........ㅠㅠㅠㅠ


혹시 몰라서 승무원에게 기내 면세로 담배 파냐고 물어보니까, 판다길래 응 나 사고싶어 했더니 조금 있다가 면세품 카트 돌아다닐거라길래 알았다고 하고는 기다렸다. 제일 만만한게 Marlboro, 한보루에 $24, 뭐 비싼건 아니겠지. 마침 내가 가져온 달러화가 있어서 $25을 냈는데, 잔돈을 거슬러주지 않는다. 영수증에는 잔돈도 적혀있는데...? 음 뭐지 싶어서 기다리려다 지금 지나면 안줬는데 줬다고 할지 모르니까 잔돈 안줬다고 했더니 엄청 미안해하면서 잔돈 $1을 준다. 원래 이런 실수 안하는데 미안하다고 하길래 괜찮아, 열시간 비행은 힘들고 피곤한거야. 했더니 또 캐빈 크루의 탈랜트 얘기 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워죽겠네....



그렇게 기내 담배까지 야무지게 사고,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


대부분 가까이의 짧은 여행을 해서 그런지

기내식이 나오는 여행은 거의 해본 적 없을 뿐더러

(나와봐야 뭐 샌드위치 나부랭이정도....)

일반 항공의 경우 기내식이 나오는 세네시간 정도의 비행도

다 저가항공을 타고 다니니

물 한 잔도 돈주고 마셔야하는... 그런 가난한 여행을 해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기름이 펑펑나는 나라의 항공사! 돈이 넘쳐나는 나라의 비행기!

딜마티가 기내에서 무료로 무한으로 제공되고

술쟁이들은 원없이 술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는

한 번 이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나면

아에로플로트나 중국동방항공이나 다 씹어먹게 되는

엄청난 돈잔치의 향연, 에티하드!!!



네, 제가 바로 그 에티하드를 타고 독일을 가게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ㅅ //




우선 기내식이 나오기도 전부터

탑승할 때 본 남자승무원 세 명이 다 너무 잘생겨서

아 우선 만족, 행복해....

뼈대가 다르다는게 이런거구나... 호주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의 외국인들



비행기를 타자마자 간단 기내식을 먹고, 한시간만 딱 자고 내내 깨있으니

엄청나게 허기가 몰려왔다.

딜마티를 계속 마셨지만, 배고픈거랑 물배차는건 다른 이야기...


아 왜 밥 안주냐... 밥 달란 말야....

허기가 지니까 배가 아파왔다

아이고 누가 보면 일주일은 굶은 줄 알겠다며... 몇시간 굶지도 않아놓고ㅠ

위장새끼 일 좀 천천히 해주시겠어요?



그렇게 배가 아파서 몸이 반으로 접혀질 때 쯤

구원처럼 이드리스 엘바;가 내 특별식을 들고 나타났다

어디 아프냐는 말과 함께

아니 배고파서...라고 하니까 너 진짜 재밌는 애라고 막 웃고 갔다

미안하지만 진짜였단다....



대부분의 항공사에서 특별식은 추가비용 없이 선택할 수 있다. 해산물이라고 해서 뭔가 일반식보다 더 좋을 것 같지만 그건 기분 탓이다. 전혀 특별할 것 없고, 다른 선택지는 주로 채식/무슬림(할랄) 이정도니까, 정말 특별할 것 없다. 해산물이라고 회나 스시 한 점을 기대한 내가 바보....



특별식을 주문하면 저렇게 자리 번호와 특별식 종류가 적힌 카드가 꽂혀있는 식사를 받게 된다. 별거 아니지만 또 특별해보이고 좋아한다. 그리고 대망의.... 해산물





사실 나는 은박을 벗겨보고 너무 놀래서 할 말을 잃었다.... 새우로 너희가 생각해낸 기내식이 죽이다 이거지....? 충격..... 마음 상함.... 하지만 처음의 상심과는 달리 또 너무 맛있게 잘,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음식 남기고 그러면 벌받아요





그렇게 뭔가 아쉬운 기내식을 싹싹 다 긁어먹고 창문을 보니

와- 역시 장거리 비행이어도 창가에 앉는건 바로 이런 사진을 위해서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장관이 펼쳐졌다

아이폰놈... 이게 최선입니까...? 훨씬 더 멋있었는데, 사진에 다 담겨지지 않았다

조금 담겨졌다 싶으면 빙구처럼 웃고있는 내가 막 비쳐있고.........ㅠㅠㅋㅋㅋㅋ




이제 아부다비 공항에서의 환승!!! 아부다비는 어떤 곳일지, 내리지는 못하지만 괜히 엄청 기대된다. 언젠가 사막투어를 하게 된다면, 꼭 다시 이 에티하드 비행기를 타고, 꼭 이드리스 엘바를 다시 만나게 되는 행운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ps. 독일에 모처럼 해가 반짝거리는 날이라, 아침에 이것만 쓰고 밖으로 나가려합니다. 혹시 기다리신다면 독일시간 화요일 오전(한국시간 화요일 오후)에 올라오는 포스팅은 이게 다에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한다.....) 비 안올 때! 해가 반짝반짝할 때 빨리 나가야해요! 언제 비올지 모르는 이 뭣같은 독일 날씨ㅠㅠㅠㅠㅠ

기내식은 미리 특별식으로 신청했다. "Seafood"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고, 바다가 없는 나라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해산물을 요리해서 먹는지 궁금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의 편협함이 얼마나 무지함과 이어지는지 알게 되는 큰 계기가 됐는데, "사막 = 바다가 없는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는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비행하는 내내 지도를 보면서 지금 어디를 날고 있는지 확인했는데, 놀랍게도 아부다비/두바이는 바닷가다. 그리고 그 두 도시는 예전부터 진주잡이와 연안어업이 발달했으며, 유전도 해저에서 발견된 거라고 한다. 나는 석유도 사막에서 나온건 줄 알았다. 이토록 무식할 수가....)



00:40AM, 탑승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샌드위치와 컵라면이 나왔다. 

특별식을 주문해서 나만 먼저 샌드위치를 주니까, 개저씨들이 배고프다고 성화였다. 1분전까지 코골고 주무시던 분들이 왜 난리세요.... 뜯었다가는 뭔가 배고픈 개들에게 불을 지피게 될까봐 뜯지 않고 기다렸다.



같이 마실 음료를 묻길래 Dilmah Lemon & Lime을 달라고 했다.




비행기 안에서의 첫 딜마티.

항상 그랬듯이 티백은 딜마를 따라올 퀄리티가 없다. 어쩜 이렇게나 차에 대한 수준차이가 나는지, 설록 나부랭이들 다 꺼졌으면.... 아모레 국정교과서ㅗㅗㅗㅗ 아이고 자판이ㅗㅗㅗㅗㅗㅗㅗ


딜마를 다 우려낸 후, 샌드위치와 컵라면까지 주는거 다 받아들고서는 같이 찍은 첫 기내 간단식. 나는 비행기에서 주는건 물도 맛있더라.... 휴.... 대책없습니다









아침이 되어서 정말 모두가 다 자고 있나 싶을 정도로 고요했던 시간,

비행기 타자마자 와... 훈남... 대박... 이라고 생각했던 승무원이 지나갔다. 가급적 훈남이 티든 기내식이든 주는게 좋습디다? 딜마 티 달라고 했더니, 종류도 묻지 않고 갖다 준다길래 뭐지.... 왜 안물어보지... 못알아듣고 커피 주는거 아닌가... 비행기에서 커피나 술은 굳이 안마시는데.... 그런거 먹으면 수면제처럼 나는 바로 잠든단 말이야....;;


그리고는 그 승무원이 가져다준 English Breakfast tea

아침이니 종류 물을 필요도 없이 이거라 생각한건가....

Milk? Sugar? 이러길래 아 밀크티면 다 있어야지 왜 묻는거야... 싶어서 둘 다 달라고 했다. 이드리스 엘바와 85%쯤 같은 외모의 남자가 Early Tea를 갖다주다니... 참나... 행복이란게 멀리 있는게 아니다 싶고... 세상이 이렇게 덧없구나 싶고 ㅋㅋㅋㅋ 누구든 Early Tea를 침대로 가져다줄 남자면 결혼할 마음이 없다가도 생길 것 같고 그랬는데... 망상이 이렇게 위험하네.... 뭔가 많이 잘못되었다....



그렇게 비행기에서 두번째 딜마티가 완성되었다.

왜이렇게 더 맛있고 난리야....







그렇게 딜마티를 더 열심히 마시고 싶어졌다.





세 번 째 딜마티, 카모마일




이제 그 잘생긴 승무원은 마치 내 전담 티 메이커 같았다. 나는 계속 다이어리와 엽서를 번갈아 쓰면서 한 모금 두 모금씩 티를 마셨고, 티가 딱 바닥에 깔릴 때 쯤에 다른 티 줄까? 같은걸로 줄까? 를 물었다. 이런 서비스라니... 제가 꼴랑 40만원짜리 특가로 비행기에 타고는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됩니까?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승무원님은 부디 복 많이 받으시구요....


이제 말 안해도 핑거푸드도 막 갖다주고... 네가 티를 많이 좋아하는거 같아서 한 개 더 갖고 왔다고 나 없어도 티 잘 챙겨먹고! 이런 소리나 하고... 참나 여보세요? 지금은 어디 계세요? 


별거 아닌 핑거푸드도 말 안했는데 챙겨주고 하니까 또 고맙고 뭐 그렇고... 생각난 김에 에티하드 웹사이트에 땡큐레터나 쓰러 가야지... 이름 모르는데 이드리스 엘바처럼 생긴 그 남자 승무원 이렇게 쓰면 안되겠지;;;




무튼 네 번째 딜마티, 





흔한 녹차와 달라, 다르다고!!! 설록ㅗㅗㅗㅗ 아이고 또 자판이ㅗㅗㅗㅗ

한국에 그런 저급 티 문화를 전파한 것을 영원히 저주하고 저주할 것이다. 

이렇게 네 종류가 에티하드에서 제공되는 딜마티고, 열 시간의 비행동안 이 네 종류를 두 번씩은 마신 것 같다. 한 시간에 티 한 잔이라니, 생각해보니 꽤 귀찮았을텐데 그저 고마워졌다.





- 여기서부터는 넋두리가 심하니 안읽으셔도 됩니당 -


한국에서 티를 즐길 때마다 꽤 자주 듣던 말 중 하나는

"먹고 살기 바빠서 차같은거 마실 시간 없다"는 멍청한 소리였다.

멍청한 사람들은 멍청한걸 꼭 티를 내야 하나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입밖으로 말을 내뱉을 때는 제발 생각을 좀 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내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을 여행할 때마다 즐거운 것 중 하나는

다양한 종류의 차를 편안히 아늑하게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내가 무얼 마시든 먹든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이 뭘하고 사는지 딱히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의 삶에 관심이 많았고, 나는 그게 몹시 피곤했다.

내가 백수로 아빠 돈을 갉아먹으면서 산다고 해서 너에게 피해를 준 것이 있는지?

내가 살이 쪘다고 해서 너에게 피해를 준 것이 있는지? 살찐 내가 쪽팔리다면 안만나면 되잖아. 왜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는건지?

말하면 입아프지만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의 하루하루를 굉장히 피로하게 만들었다.


특히 서른이 넘은 미혼 여성에 대한 각종 인신공격들은

나라가 멀쩡히 돌아가는게 신기할 정도로 각종 개저씨들과 같은 여자들에 의해서 난도질당했다. 저의 자궁은 혹시 국가 소유인가요? 제가 어디 애낳는 기계여야하나요?

서른이 넘은 살찌고 남자친구가 없으며 직업도 없는 나는 최하층민이자 아무에게나 아무 개소리를 들어도 되는 그런 위치였다. 위치 자체가 없었다. 나보다 하급은 없었다. 정신나간 분들은 부디 자살을 추천합니다, 한강물이 녹았습니다.



러시아 여행을 갈 때도, 일본 여행을 갈 때도, 독일로 떠나는 이 비행기 안에서도 나는 나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의 나는 규정되어져야했다. 라벨링이 되어야했고, 최하급이라는 도장이 이마에 찍힌채 살아야했지만, 한국을 떠나는 이 비행기 안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Ausrei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머 넘치는 에티하드 승무원들  (0) 2016.04.23
기내식이 맛 없을 수도 있나요?  (0) 2016.04.23
열 시간의 비행 중 한 시간의 꿀잠  (0) 2016.04.23
EY873, ICN - AUH  (0) 2016.04.23
자! 유! 를! 찾! 아!  (2) 2016.04.23

그리고 남은 9시간은 내내 엽서쓰고 다이어리 썼다


비행기에서의 테이블은 엄청 좁아서

사실은 기내식만 딱 먹는 용도가 맞다


그 안에서 누가 펜을 꺼내고 법석을 하겠냐며....


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그건 바로 나



엽서 쓰다가 비행기 시간 촉박하게 와놓고

비행기 타서 또 엽서쓰는 사람도 로 나



어쩌겠냐며, 너무 재밌고 즐거운데.....






내가 독일로 떠난다고 하니, 반고흐 엽서 세트를 선물해줬다

가격을 떠나서,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은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엽서 열어보니 퀄리티는 또 어찌나 좋은지....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많은 그림들이 엽서 속에 담겨 있어서

다 쓰지는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그저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몇개의 그림을 빼놓고

스무장이 넘는 엽서들을 펼쳐놓고 어떤 엽서에 보낼지 상대방을 상상했다






내게 이 고흐 엽서 세트를 선물해준 친구에게는 저 흰 옷 입은 여자가 들판에 서 있는 엽서를 썼다. 내게 이런 명화 엽서를 선물해준 고마운 사람이 마치 천사 같이 느껴졌다.


친한 언니들 중 한 명은 가장 빨리 독일에 올 것 같아서, 마차를 한국까지 보내는 듯한 느낌으로 다리 위에 마차가 지나가는 그림에 엽서를 썼다.


그리고 고단해보이는 부부가 누워있는 엽서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보냈다. 요즘 일도 많아서 잘 쉬지도 못하는데, 그림으로나마 푹 쉬는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저 그림은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그림이기도 한데, 언니니까 내가 쓰는거야...



무튼 그렇게 하나하나 받을 상대방을 상상하며 매치해가면서 엽서를 쓰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즐거웠다. 여태까지 한국에서 외국으로 발송하는 엽서들은 400원이라 그 한 장을 쓰는데 많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독일에서 보내는 엽서는 분명 400원보다 비쌀 것이기 때문에, 엽서 한 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하니, 괜히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엽서를 쓰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보통의 야간 비행은 주간 비행에 비해 승무원이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기내식 챙겨주는거와 가끔 술 찾는 아저씨들 빼고는 할 일이 많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안자고 몇 시간 째 뭔가를 자꾸 써대는 아시아 여자 한 명이 있으니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지...


게다가 자꾸 딜마티를 내놓으라고 하니...ㅋㅋ 잘은 모르지만 몹시 귀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년필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딜마티는 엄청나게 잘 어울린다. 너무너무 좋은 조합이다. 그 높은 고도에서도 만년필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딜마티의 향이 만난다면 아무것도 힘들지 않고 계속 뭔가를 쓰고 싶어진다.






'Ausrei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머 넘치는 에티하드 승무원들  (0) 2016.04.23
기내식이 맛 없을 수도 있나요?  (0) 2016.04.23
(간단한 기내식 사진과) FREE Dilmah and Idris Elba  (0) 2016.04.23
EY873, ICN - AUH  (0) 2016.04.23
자! 유! 를! 찾! 아!  (2) 2016.04.23

23/04/16 00:10AM, Gate will be closed


그런데 게이트 문을 자정이 되서도 안열어주고....ㅋㅋ 자정 지나서 탑승시작해서 나는 00:10이 되어서야 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예약할 때 여기저기 많이 확인하고 좋은 자리라는 22열을 예약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좋을 줄이야....오버차지고 뭐고 그냥 원래 가격이 그렇다고 생각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엄청나잖아....? 그런 자리를 내가 그렇게 헐값에 샀다고???? 어찌나 행운이 넘치는지 (감정기복 심함 ㅋㅋㅋㅋ)



두 명 앉는 자리 중 창가자리인데 내가 앉고나서 10분이 지나도 옆자리가 채워질 생각을 안한다. 제발 빈 자리ㅠㅠㅠㅠ 제발 저에게 행운이 또 한번ㅠㅠㅠㅠㅠㅠ 이라고 생각하면서 11분이 지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12:21AM, 이제 사람들은 다 탑승한 것 같은데 누굴 기다리나 싶어서 한국인 승무원에게 물어봤더니, 두 명이 아직 탑승을 안했다고 대답해주셨다. 그러면서 예쁘게 말하기 교육이라도 받으시는건지ㅠㅠㅠㅠ "두 명이 올건데 뒷쪽에 빈자리가 조금 있으니 아마 이 자리는 빈 자리일 확률이 높아요!" 라는 말도 같이 해주셨다 제발 저에게 그런 행운이 함께하길.......


조금 지나니까 승무원들이 더 바빠보이길래 그 한국인 승무원을 쳐다보자, "축하드려요!!!!"라는 말을 해주셨다 ㅋㅋㅋㅋㅋ 웃는 것도 엄청 예뻤고ㅠㅠㅠㅠ 비행내내 나 챙겨주시고ㅠㅠㅠㅠ 제가 뭐라고ㅠㅠㅠㅠㅠㅠ 무튼 그렇게 인천-아부다비 10시간 5분의 비행을 옆자리가 비어있는, 비상구 바로 앞 줄이라 마음껏 제쳐도 되는 엄청나게 좋은 자리에서 편하게 비행을 하게 되었다




뒤로 살짝만 제낀 내 자리와 빈 옆자리





뒤에서 보면 이정도의 공간이나 남아있다

아무리 뒤로 젖혀도 뒷 사람에게 피해가 하나도 가지 않는 최고의 자리

비행기는 00:40AM

부모님은 바쁘신 분들이라 본가가 있는 도시에서 배웅

리무진 시간은 12:00PM

출국 12시간 전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다


6시간이 걸려서 공항에 도착했고

엄청난 짐들 앞에서 나는 또 나의 미련함을 탓해야했다

그 취미생활 나부랭이 안하면 되는거 아니야? 와

취미생활이 없으면 왜 사는데? 뭐땜에 사는데? 의 양가감정 사이에서

언제나 이기는건 후자였다


누군가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보고 한참 웃은 적이 있다

"취미가 많아 가난합니다"

완전 나잖아.......

그리고 그 취미들은 약간 부유한 취미입니다 까지 더해지면 완! 벽!


부유한 사람들의 취미를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가진다는건

어쩌면 몹시 잔인한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부유한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은

제 입장도 생각해 주세요....



무튼, 그렇게 엽서 수백장;;;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체크인은 출국 세 시간 전부터니까 9:40PM부터 카운터가 열릴 것이고

나는 약 4시간이나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공항 소인을 찍은 우편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냈다



우체국이 6시에 문을 닫으니 545분쯤 공항에 도착한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우체국으로 달려가서 인천공항 특별소인부터 찍어야했으니까




나는 PostMark에 대한 나의 짝사랑이 공항에서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심지어 찍고나서 너무 예뻐서 감탄까지 했다...



우선 우다다 찍어두고, 우체국 문 닫은 이후인 6시에는

출국층 스타벅스 옆에 앉아서 굳이 300원 텀블러 할인까지 받아가며

망고바나나를 흡! 입!



부모님께 보여드리려고 멀쩡한 부분만 찍은 사진...

이거 말고도 쇼핑백이 세 개가 더 있다........ㅋㅋㅋㅋ

다 들고온 내가 정말... 휴...



무튼 찍어둔 소인들을 보면서 생각나는 사람들과

원래 보내야했던 우편물들을 전부 정리하고 나니

열통이 넘었다....;;

가져온 우표들도 열심히 붙였다

귀한 우표들도 몇 개 쓰고, 이번에 자취방 정리할 때 보니까

껴안고 산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싶긴 해서

열심히 열심히 뭐든 갖고 있지만 말고, 쓰려고 노력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편물은 다 마무리 됐고,

수화물을 보내려는데, 쇼핑백에 든 것들을 큰 캐리어에 우겨넣었다

원래 23kg 딱 맞춰서 왔는데, 쇼핑백 세 개가 더해지니까 31.8kg....

야 이.... %%%%ㅁㄴㄹ앰리ㅑ 읾ㅇ낢 ㅇㄴㄹ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떻게 한 25kg정도는 봐달라고 어필할 수도 있는데,

거의 10kg가 넘은건 빼도박도 못하고....

독일은 엽서가 비싸댔는데 가서 사면 다 돈인데.... 의 마음과

어차피 수화물 추가도 돈이야!!!! 멍청아!!!! 의 마음이 공존....

양가감정 새끼 부디 없었으면...ㅠㅠㅠㅠ



하지만 저는 언제나 멍청아!!!의 선택을 하죠

씨원하게 돈지랄을 하며 수화물 추가를 선택합니다

그래도 하늘이 절 마냥 버리진 않는다고 생각한 점 하나는

32kg까지 1차 수화물 over-charged

32kg부터는 2차 수화물 over-charged

32kg는 넘지 않아서 더 심각한 돈지랄은 하지 않아서 기쁜 마음으로 생각하기로...

원효대사 해골물 해골물 해골물....ㅠㅠㅠㅠㅠㅠㅠㅠ

아이고 돈 아까워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무튼 그렇게 씨원하게 32kg 짐을 보내고 나니

분명 몸이 가벼워야하는데! 여전히 무겁군요....

여전히 짐이 많으니까..........................=_=....


수화물 무게때문에 고생하고 뭐 결제하고 그러는거 시간 걸리고 해서

당장 출국장으로 떠나야하는데, 아직 우편물을 못보냈는데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인천공항에는 2층에 우체국과 우체통이 있고,

3층 출국장에는 정중앙의 외부에 우체통이 있는데

아무래도 정중앙의 우체통까지 다녀오려면

면세점을 포기해야하는 그런 시간....

분명 공항에 6시간 40분 전에 도착했는데요....?????

왜 저는 시간이 부족하죠??????

따로 밥을 먹은 것도 아니고 저녁도 걍 스벅에서 베이커리 하나 먹었는데...


억울하지만 지금 억울함을 어디 얘기해봐야 소용없고....

체크인 카운터에 부탁을 했다

우편물(티백도 몇개씩 넣어서 막 두툼함ㅠㅠㅠㅋㅋ) 이거 우체통에만 넣어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지금 바로 출국해야해서요ㅠㅠㅠㅠㅠ 제발 부탁 좀 할께요ㅠㅠㅠㅠㅠ

방금 체크인할 때 오버차지 낸게 불쌍해서인지,

내가 출국장에 늦으면 괜히 비행기 출발에 문제될 수도 있을거 같아서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엄청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냥 우체통에만 넣으면 되는거죠? 라고 하셔서

네네네네네 하고 난 출국장으로 마구 달려야했다


출국 6시간 40분 전에 공항에 도착해도

바쁘게 면세점 인도장에 달려가야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다니

네 있습니다... 있네요.......... 그건 바로 저



출국 수속하는데 줄은 왜 그렇게 긴지ㅠㅠㅠㅠㅠㅠㅠ

저기요!!!! 제가 태어나서 시계를 처음 사보는데요!!!!!!!!

면세점 인도장에 있는데 제가 그거 못찾을 수도 있을거 같아요ㅠㅠㅠㅠㅠ

저부터 수속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ㅠㅠㅠㅠㅠ 라고 외치는 나를 상상하고는

제발 이렇게까지 급하게는 다니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될 지는 잘...



줄은 길었지만 생각보다 금방 훅훅 지나가서

나도 훅훅 지나갈 줄 알았지만,

필통에 커트칼 나와서 뺏기고

스타워즈 물통도 뺏기고

뭐 다 가져가라 야 다 가져가

배고플 때 먹으라고 엄마가 싸준 토마토는 내가 먹고 뚜껑을 잘못 닫아서

쇼핑백 안에서 새고 난리법석이 되고

아이고 신이시여 제가 부디 시계를 찾을 수 있게 해주세요ㅠㅠㅠㅠㅠ



확인하고 면세점 인도장 갔어야하는데

두 개 중에 하나 찍는건데 이게 피해가겠어?

피해간다고!!!! 넌 항상 그랬다고!!!!!!

휴.... 진짜 막 뛰고 뛰고 법석에 법석을 거듭해서

면세품을 찾는거까지 완료..................

셔틀트레인타고 가는 비행기였으면 아마 면세품 못찾았을거라고 생각하니까

지금 내 노트북 옆에 있는 이 시계가 더 소중하고 그렇네....


비행기 입구 닫히기 8분 전에 미친듯이 달려서 게이트에 도착했는데

아직 보딩을 안했잖아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저를 버리시진 않으셨나봐요.... 감사합니다....

물통에 물 가득 담아서 원샷하고

화장실 갔더니, 다들 왜 세안하세요????

음 장거리 비행이라 화장 지우고 타야한다고????

아하? 나도 따라하기.... 별로 화장 한 것도 없지만 따라하기 ㅋㅋㅋㅋ

얼굴 씻었더니 가면 벗은거 같고 행복


화장 두껍게 하는 편도 아닌데 화장 지우고 나면 왜 그렇게 행복한지 ㅎㅎ




무튼 그렇게 정신없이 출국 완료!!!


비행기에서는 어떤 재밌는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고 타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꿀잼 ㅋㅋㅋㅋㅋㅋㅋㅋ

어디서든! 일을 만들고! 어디서든! 적응하는! 나의 초능력 +_+v



독일어 공부를 최소한이라도 하고 가겠다며

워홀 비자를 발급 받고 바로 출국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정리할 것들도 남았고,

10년 넘게 밖에서 지내온 자취짐도 정리해야했고

거의 한국에서의 신변을 정리하는 기분으로 버리고 버리고 버려도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새삼 깨달았다


병적으로 수집해왔던 나의 삶이었는데

영화티켓이며 영수증이며 뭐 전부 다 버려야했다

그 어디에도 내 짐들을 위한 공간은 없었기에




그리고 독일로 가져갈 짐을 싸는 것도

옷이나 그런건 한국에서도 그렇게 유난스럽게 입지 않았기에

두세벌로 빨아서 돌려입으려 했는데

엄마는 그런 나를 철천지 원수처럼 대했다

어쩜 그러냐고, 옷 있는거 다 챙겨가라고

그래서 엄마가 있을 때 싼 짐은 다 옷들이고,

새벽에 나 혼자 몰래 싼 짐은 다 잡동사니들이다.



어쩌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인데,

그 작은 돌멩이가 이렇게 큰 파도가 될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저지르고 보는거지 뭐!!!


30여년간의 내 삶을 요약하면

저지르고 수습하며 사는 삶이었다




출국 이틀 전날 까지도 짐 하나도 안싸고 그저 일상을 즐기다가

출국 전날에 밤새면서 짐을 쌌다.

쟤는 또 닥쳐서 한다고 엄마도 아빠도 혀를 끌끌 차셨지만,

나는 닥치지 않으면 모티베이션이 없어서 뭐가 안되요... 이런 딸이라서 죄송합니다




28인치 캐리어, 23키로가 겨우 맞춰졌다

기내용 캐리어, 7키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대충 체크인할 때 분위기보고 판단해야지



우선 공항에 전부 다 바리바리 들고가서

정 안되면 버리거나, 친구한테 부탁해서 택배 하나만 어디 창고에 맡아달라고 하기로

엄청난 양의 짐을 추가로 싸매고 가기로 결정



엄마도 아빠도 그따위로 짐싼 나를 보고 또 한심해하셨지만

저는 이렇답니다. 이런 저를 한심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모두가 같은 방법으로 사는 건 아니잖아요? (당_당)


유럽에 가게 된다면 (이런 방법으로 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반드시 에티하드나 카타르를 타고

사막 투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있다

(나는 막연한 희망과 생각에 대한 이상한 믿음이 있는데

막연하고 구체적이지 않을 수록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그것이 이뤄지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돌아올 때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인천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탈 생각이 있기 때문에, 편도로 비행기를 발권해야했고, 에티하드나 카타르의 비행 분위기를 알아야했다.


보통 그 나라의 국적기는 그 나라의 분위기와 많이 따라가는 편이고, 히잡쓴 여자들이 많이 타거나 한다면 조금 꺼려질 것도 같았다. 그 여자들이 꺼려진다기보다 여자를 물건으로 취급하는 그 문화 자체가 안맞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평가는 내게 원래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고,

최소 한 번 이상의 내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에티하드나 카타르의 특가가 뜨길 기다렸다




기적처럼 에티하드의 특가가 떴고

바로 예약!!!

매일 비행기 티켓 확인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비상구 앞줄이라 누워서 가기에 최고라는 22열에도 예약에 성공했다




내가 에티하드 항공을 선택한 이유는

1. 언젠가의 사막여행(스탑오버로의 짧은 여행이지만)을 꿈꾸며,

 에티하드 항공 미리 경험해보기

2. Dilmah!!!!!! Dilmah!!!!!!!!!


이 두 개가 전부다.

특히 딜마티와 관련해서는 비행기에서 재밌는 일도 있었다.



무튼 40만원에 인천-아부다비-프랑크푸르트 비행기 발권 완료


'Bevo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렇게 무작정 가도 되는 걸까?  (0) 2016.04.22
만 30세는 사유서를 써내야 한다  (0) 2016.02.17
많은 나라 중 독일을 선택한 이유  (4) 2016.02.16

종종 그런 글을 보긴 했었다.

30세에 신청하니까 사유서를 써내라고 했고

이거 혹시 탈락하는거 아니냐고

탈락할 수도 있다.

세상일에 100%라는건 없으니까


그래서 그 사유서를 쓴 사람들을 더 열심히 찾아봤다

그냥 별 말 안썼는데 통과시켜줬다는 사람도 있었고

열심히 썼는데 불합격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역시 인생은 복불복...


그렇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니까 열심히 쓰기로 한다



대사관에서 내게 추가로 요구한 것은 두 개.

보통 이 두 개라고 한다.

영문 이력서, (워홀로 가기에는) 나이가 많은데 왜 가야하는지 사유서 한 장


영문 이력서는 이미 작성해둔 게 있어서 그냥 뽑아갔고

혹시 안걸릴 수도 있으니 사유서는 쓰지 않고 갔다


생일이 열흘도 남지 않았기에, 사유서에 당첨되었다




사유서를 빨리 보내야 내 워홀 서류 심사도 빨리 진행되겠지.

밤새 열심히 썼다.


그간 자기소개서를 다양히 열심히 쓴 덕분에 작문 실력이 꽤 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소개서를 헛쓴건 아니라는 생각도 든 것이

사유서도 어차피 독일 대사관에서 읽는거니, 회사에 제출했던 자기소개서의 그 작문 틀과 유사하게 적용할 수 있었다


너희 회사 제품 뭐뭐 써봤는데, 너무 좋더라.

구매자로서 조금 불편했던 점들은 회사에 입사해서 내가 직접 바꾸고 싶어!


독일 제품을 써본 게 은근 많은데, 다 너무 좋더라

독일에 직접 가면 얼마나 더 많은 재미있는 것들이 나를 반겨줄까?



이런 틀.

읽는 회사/독일을 칭찬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해야하는지/독일에 가야하는지 

그렇게 정신없이 쓰다보니 한 페이지가 채워졌고

공문이니 위아래 공문 서식은 맞춰주며

나 그렇게 멍청이 아니야!

독일어는 하나도 못하지만 영어작문도 이정도는 할 줄 알아! 를 어필하며

혹시 모르니, 아니면 이런 것도 세세하게 PDF로 변환한 파일과 Word 파일을 대사관에 전송!

부디 누군가가 *.hwp를 보내는 일은 없길 바라며....





합/불합의 여부는 따로 알려주지 않고

내가 제출한 여권에 비자가 붙어있으면 합격, 없으면 불합격



내가 사유서에 이만큼이나 공을 들였는데, 혹시라도 안된다면

그건 한국에서 최저임금 받으면서 그렇게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살아가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서럽기도 했다.


어째서 모국은 그렇게도 비현실적인 노동구조를 갖고 있는가...



무튼, 내 할 일은 모두 내 손을 떠났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취업준비생이라는 허울뿐인 이름뿐인 백수나부랭이로 지낸지도 1년이 지났다.

1년만 지났나, 더 긴 시간이 지났다.

그 긴 시간 속에서도 그 기준선에 통과하는 회사는 없었고

있었어도 연봉 1800을 부르며 나를 화나게 했다



아무리 한국에서 더 이상 대졸과 석사졸에 큰 차이는 없다지만

연봉 1800이면 한달에 얼마를 받는다는건지

그 와중에 1800은 세전이었다.



내가 눈이 높아서가 아니다

한국이 잘못된건데

다들 눈을 낮춰서 가라니 어쩌라니

눈을 낮춰서 들어간 회사가 맘에 안들면

나는 또 취업준비생이라는 신분으로 돌아가야한다

그럴 수는 없었다



눈을 낮춘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딱, 10년 전 호주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간 지낸 적이 있다.

대학생 신분이라 더 행복했지만,

영어에 능숙하지 않아도 외국 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물론 대학에서는 한국에서 한 번도 받아보지 않았던 F를 받기도 했지만,

뭐 어차피 F 뜬 과목은 한국의 성적표에 기입되지 않으니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의 내 나이로, 합법적으로 1년이 체류 가능한 나라를 찾아야했다.



생각보다 답은 가까이 있었다.

독일은 워홀 신청기간이 따로 있지 않았고

언제든 신청하면 일주일 이내에 거의 100% 워홀 비자가 발급된다.

이렇게 신박하고 감사한 나라가 있나...


독일에 대한 막연한 동경뿐이었던 나는

(세계대전 관련 이야기 굉장히 좋아해서 독일에 대한 이미지가 그저 좋다)

어쩌면 내가 독일에서 1년을 지낼 수도 있고

그것을 더 연장해서 평생 독일에서 지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저 들떠서 정신을 못차리게 된다



이 때가 딱 2월 초였다.

85년생 2월 생인 나는, 2016년 내 생일 전날까지는 만30세,

내 생일 부터는 만31세가 되기에 (독일 워홀 신청기준으로)

생일 전에 어떻게든 빨리빨리 서류를 준비해야했다.


찾아보니 서류도 많지 않았다.

여권 사진, 독일 체류 1년간 보장되는 보험 가입 증서, 여권, 신청서



보험은 종류가 두 개밖에 없어서 둘 중 그냥 싼 걸로 했다.

아프지않으면 되니까, 가진게 체력 하나뿐이니까.

여권 사진은 이전에 취업용으로 찍어둔 사진을 재활용하려했는데,

사진이 과하게 잘 나와서 혹시 본인과 다르다고 할까봐

(엄밀히 말하면 사진에 손을 안대야하는게 맞으니)

새로 찍었는데, 턱이 세개로 나온 몹시 사실적인 사진이었다.

비자에도 사진이 들어가는 줄 알았으면 턱만큼은 어떻게 좀 했을텐데....

그래도 조금 작게 들어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든다


이런저런 글들을 찾으니, 은근 여권사진에서 많이 탈락한다고 한다.

3개월 이내의 사진이어야하는데, 여권 발급을 4년 전에 받아놓고 같은 증명사진을 제출하면 3개월 이내의 사진이 아니라 비자 발급 거부.

기본 문구에 충실해서 준비해야한다는 걸 다시 느꼈다.




그리고 신청비 7만 얼마. 유로 환율에 따라 달라지는데 보통 75000~8만원사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렇게 독일을 번갯불에 콩궈먹듯 정하고 서류를 준비해서 대사관에 216일에 갔다.


+ Recent posts